“쇼우 미 패스” - 벽계리 미군부대 정문에서
1960년대 농촌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먹고살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학교를 졸업해도 갈 만한 직장이 많지 않았다. 특히 농촌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런 벽계리에 미군부대가 들어섰다. 미군부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다. 미군을 직접 상대하는 군사 업무는 아니었지만, 부대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한국인들이 맡았다. 경비원, 청소원, 세탁원, 숙소 관리원 등 종류도 다양했다.
당시에는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좋은 직장이었다. 무엇보다 매달 정해진 날에 꼬박꼬박 월급이 나왔다. 농사만 지어서는 좀처럼 만져보기 힘든 현금이 매달 들어왔다. 게다가 미군들과 함께 근무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미군부대 취업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직장이면서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직장이었다. 사람들은 미군부대 취직을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벽계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 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한동안 집에서 쉬고 있었다.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서 씨의 집에 미군부대 직원 한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부대 안에서도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서 씨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서 씨는 미군부대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서 씨가 처음부터 벽계리에서 근무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기서 근무한 게 아니고 당진 찰리로 갔었지. 여기는 대대본부이고 예하 부대가 몇 군데 있었는데 당진 가서 근무했지.”
당시 벽계리 미군부대는 대대본부였다. 그 아래 당진과 대천에 예하 부대가 있었다. 부대에는 각각 알파(Alpha), 찰리(Charlie), 브라보(Bravo)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벽계리는 ‘알파 부대’, 당진은 ‘찰리 부대’, 대천은 ‘브라보 부대’였다.
서 씨는 처음 당진의 ‘찰리 부대’로 발령받아 외곽 경비를 맡았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나 벽계리 ‘알파 부대’로 전입해 정문 근무를 시작했다. 벽계리에 근무하면서 미군부대 일자리는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국회의원 파, 도지사 파, 군수 파…” 서 씨가 부대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묘한 농담이 오갔다. 누구는 ‘국회의원 파’, 누구는 ‘도지사 파’, 누구는 ‘군수 파’라고 했다. 좋은 자리를 얻으려면 든든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서 씨도 훗날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중에 보니까 아무나 막 들어갈 수 있는 경비원 자리가 아니더라고. 국회의원에 준하는 빽을 가진 사람들, 들어가서 보니까 ‘무슨 파’, ‘무슨 파’, ‘무슨 파’ 이렇게 빽으로 들어온 사람들…” 사람들은 서 씨도 누군가의 빽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 씨의 아버지가 광천읍사무소 호병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청에 근무하는 아버지가 어디에 줄을 대서 아들을 취직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서 씨는 집에 세 들어 살던 미군부대 직원의 주선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어찌 보면 우연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행운이었다.
벽계리 미군부대 정문에서는 한국인 경비원 혼자 근무하지 않았다. 미군 한 명과 한국인 한 명이 한 조가 되어 근무했다. 서로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달랐다. 무엇보다 생활 수준의 차이가 컸다. 당시 한국은 아직 가난했고, 미군들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서 씨는 근무하면서 그 차이를 피부로 느꼈다.
“걔들은 우리를 대하는 게 우월감이 있었어. 생활에 대한 우월감 뭐 그런 거지. 우리는 그때만 해도 60년대 후반이고 생활이 좀 어려웠던 시절이고, 걔들은 이제 도와주러 왔다는 그런 우월감이 있었지.”
한국인 직원들은 미군의 지시를 받아 일했다. 그런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거리감도 있었다. “우리는 또 하청이라는 그런 직업이었고, 걔들 밑에서 일하는 그런 직종이고, 걔들 지시를 받고 일하는 직장이었고, 뭐 말로는 표현을 정확하게 할 수는 없어도 그런 경향이 있었지.”
그렇다고 모든 미군이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서 씨의 기억 속에는 친절하고 겸손한 미군도 있었고 유난히 위압적으로 행동한 미군도 있었다. “착한 애들은 또 착한 애들대로 착했고, 위협적인 애들은 또 위협적인 애들대로, 그런 갈등이 있었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했다.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까다로운 사람도 있었다. 서 씨는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도 쉽게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못살아서 겪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정문 경비원의 주된 업무는 출입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차량이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기록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확인했다. 기름을 실은 차량이 몇 시에 들어왔는지, 몇 리터를 싣고 왔는지, 어디에 얼마나 부리고 나갔는지도 기록했다. 부식차가 들어오면 무엇을 싣고 왔는지도 확인했다.
미군들의 외출과 귀대 시간도 꼼꼼하게 적었다. 한국인 직원들이 부대 밖으로 나갈 때 가지고 나가는 물건도 검사했다. 서 씨는 당시 업무를 이렇게 기억했다. “걔들은 이제 모든 것을 우리한테 일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기록하거든. 무슨 차량이 몇 시에 나가고 몇 시에 들어오고, 뭐 무슨 기름차가 몇 시에 몇 리터를 싣고 들어와서 몇 리터를 부리고 나가고, 부식차가 몇 시에 들어와서 뭐를 부리고 나가고, 미군이 몇 시에 외출했다가 몇 시에 들어오고, 뭐 이런 모든 것을 전부 일지에 기록하는 그런 업무였지.”
정문에서는 한국인 직원들이 사소한 물건을 들고 나가는 것도 살펴야 했다. 다만 작은 물건 한두 개 정도는 눈감아 주기도 했다. 그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정문 근무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영어였다. 미군들과 직접 대화를 해야 하는데 영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가 전부였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다. 서 씨는 몇 가지 말을 외워서 써먹었다. “쇼우 미 패스(Show me pass).” “익스큐스미, 쇼우 아이디 카드(Excuse me, show ID card).”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말이었다.
“정문 근무는 이제 기본이 영어가 돼야 해. 그런데 내가 영어를 못하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야. 걔들이 나갈 때 무조건 ‘쇼우 미 패스’, ‘익스큐스미, 쇼우 아이디 카드’ 같은 기초적인 말을 배워서 써먹었지. 그런 게 제일 큰 애로사항이었어.”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눈치가 중요했다. 미군이 바쁘게 정문을 빠져나갈 때면 이름을 물어볼 틈도 없었다. 그럴 때는 재빨리 명찰을 확인했다. “걔들이 그냥 후딱 나가면 얼른 명찰을 보고 이름을 기록했어. 이제 중학교까지는 공부해서 알파벳은 쓰니까 걔들 나가면 명찰 보고 ‘잭슨’이면 ‘잭슨’이라고 적고 몇 시에 나가고 몇 시에 들어왔다고 눈치껏 기록했지.”
그 시절에는 그것이 서 씨의 생활이었다. 미군들이라고 해서 부대 안에서 마음대로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대 안에서는 계급에 따른 위계질서가 상당히 엄격했다. 밖에 나와서는 친구처럼 어울리던 미군들도 부대 안에서는 군기를 지켰다. 규정을 어기거나 근무태도가 불량한 군인들은 외출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서 씨는 그때 정문에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한다.
“미군들도 외출 금지당하는 애들 명단이 매일 뜬다고. 뭐 총기 손질이 불량해서 외출 금지를 당했다든지, 법규 위반이나 뭐를 잘못해서 외출 금지라는 명단이 뜨지.” 정문을 지키던 서 씨에게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오갔다. 어제 보았던 미군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고,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누군가는 외출을 나갔고, 누군가는 돌아왔다. 차량이 들어오고 나갔다. 그 모든 것이 일지에 기록됐다. 당시에는 평범한 근무의 하루였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하나하나가 모두 추억이 됐다.
세월은 참 빠르게 흘렀다. 벽계리 미군부대가 문을 닫은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지났다. 당시 정문에서 함께 근무했던 미군들의 얼굴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때때로 서 씨는 그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정문에 서서 미군의 신분증을 확인하던 일,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명찰을 훔쳐보며 이름을 적던 일, 차량의 출입 시간을 기록하던 일, 친절한 미군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일, 때로는 자존심이 상해 속으로 화를 삭이던 일, 그 모든 기억이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난다.
‘벌써 이렇게 오래됐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0~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했던 일이다. 그곳에서 받은 월급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를 공부시켰다. 미군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영어를 몇 마디 배웠고 낯선 세상을 경험했다. 수십 년이 지나 돌아보니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한 시절이 되었다.
하늘의 별처럼 어렵게 얻었던 미군부대 일자리. 그 별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 별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 벽계리 어딘가에 남아 있다. “쇼우 미 패스.” “익스큐스미, 쇼우 아이디 카드.” 벽계리의 미군부대 정문에서 주고 받던 영어 한마디. 그 짧은 한마디가 어쩌면 40여 년 전 벽계리와 미국을 이어주던 작은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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